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 <약전(小)>
(1922~2009)
◇ 탄생과 소년 시절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윤음; 양력 7월 2일) 경상도 대구(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225-1)에서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 부부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아 세례 때 받은 세례명은 스테파노.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훗날에 택한 아호는 ‘옹기’다. 본래 이름은 ‘수한(壽漢)’이었으나 출생 신고서에 ‘수환’으로 잘못 기록되면서 그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의 집안에서 처음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조부인 김요안(金要安)으로, 1869년의 병인박해 때 충청도 연산(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조모인 강말손도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석방되어 김영석 요셉을 낳았다.
유복자로 태어난 요셉은 장성한 뒤 옹기장사로 생활하면서 달성(達城) 서씨 집안의 마르티나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런 다음 처가가 있는 대구로 이주해 살면서 막내 김수환 스테파노를 얻었다. 이후 그는 선산과 군위로 이주해 살다가 스테파노가 군위보통학교 1학년에 다닐 때 병으로 선종하였다.
이때부터 가족의 삶은 더욱 각박해졌다. 그러나 모친은 자식들의 신앙 교육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고, 특히 스테파노와 세 살 위의 형인 동한(東漢) 가롤로에게는 “사제가 되라.”고 당부하였다. 당시 스테파노는 장사를 해서 독립한 뒤 가정을 꾸리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모친에게는 차마 이러한 꿈을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1]
◇ 신학생의 길, 그리고 사제 서품
1934년 4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김수환 스테파노는 형 가롤로의 뒤를 따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예비과 5학년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936년 4월에는 서울 소신학교 즉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의 갑조(甲組)는 일반 중등학교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하는 신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였고, 한때는 신학교에서 쫓겨날 심산으로 꾀병을 부린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된 스테파노는 여러 가지 성인전을 접하면서 많은 감동을 받고 사제의 길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특히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 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1941년 3월에 소신학교를 졸업한 스테파노는 같은 해 4월 일본 도쿄에 있는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9월 문학부 철학과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1944년 1월 태평양전쟁 말기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졸업장을 받지는 못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귀국한 그는 1947년 9월 서울 혜화동의 대신학교인 성신대학으로 편입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신학생으로서 순수한 열정을 마음에 품고, 성경 다음으로 애독하던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n of Christ)」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대신학교 생활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삭발례(削髮禮)였는데, 그날의 복음 가운데서도 “야훼 하느님은 나의 유산이다.”라는 말씀이 감동적이었다. [3]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부산으로 내려간 스테파노는 영도의 임시 신학교에서 대구대목구장 최덕홍(崔德弘) 요한 주교에게 마지막 수업을 받았다. 그런 다음 1951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후배 정하권(鄭夏權) 플로리아노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장소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 서품 성구는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3)라는 말씀이었다.
◇ 짧았던 본당 사목과 독일 유학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의 첫 사목지는 안동 본당(현 목성동 주교좌 성당)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가톨릭 구제회의 한국 지부장 조지 캐롤(G.M. Carroll, 안 제오르지오) 몬시뇰에게서 받은 지원금으로 성당을 보수하면서 일하러 오는 주민들에게 후한 품삯을 주었다. 또 궁핍한 신자들에게는 고해소 안에서 생활비를 주고 반드시 비밀을 지키도록 하였다. 매일 저녁 교리반을 열었고,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요청해 오면 마다하지 않고 응해주었다.
그렇게 신자들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인 1953년 4월, 스테파노 신부는 대목구장 최덕홍 요한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2월 14일 아버지 같은 요한 주교가 선종한 데 이어 1955년 3월 사순시기에는 모친 마르티나마저 선종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1955년 6월, 스테파노 신부는 김천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1년 남짓 사목하다가 다음해 7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한 곳은 뮌스터(Münster) 대학, 전공과목은 ‘그리스도교 사회학’이었다. 지도 교수는 요제프 회프너(Joseph Höffner) 신부로, 사회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 여름, 스테파노 신부는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요제프 회프너 신부가 뮌스터 교구장에 임명되어 학교를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후임 지도 교수가 배정되지 않자, 그는 고민 끝에 학위를 포기하고 1964년 5월에 귀국하였다.
◇ 초대 마산교구장 임명과 주교 서품
귀국한 스테파노 신부에게 맡겨진 직무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이었다. 처음 접하는 언론 사업이었지만,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동안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다. 훗날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던 때”라고 술회하였다.
1966년 3월 어느 날. 스테파노 신부는 뜻하지 않게 주한 교황사절 안토니오 델 쥬디체(Antonio del Giudice) 대주교로부터 ‘한번 만나고 싶으니 서울로 오면 좋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무슨 일일까?’ 상경하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과 같이 쥬디체 대주교는 뜻하지 않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교황 바오로 6세(재위 : 1963~1978년) 성하께서 1966년 2월 15일 자로 부산교구에서 마산 지역을 분리하여 새 교구로 신설하셨네. 동시에 당신을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셨다네.”
스테파노 주교는 모든 것을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현 8월 22일)을 서품일로 잡았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사제로 태어났던 것을 기억하면서 성모성월 마지막 날에 주교로 태어나고 싶었다. 사목 표어는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로 정했다. [4]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 몸과 피를 내어 주신 예수님처럼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서품식 및 마산교구장 착좌식 장소는 성지여자중고등학교 운동장, 주례는 쥬디체 대주교였다. 신자 수 3만 명, 본당 21개의 시골 교구를 이끌어가는 교구장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스테파노 주교는 자주 교우들과 만났고, 그들에게 ‘평신도와 사제, 수도자는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면서 시대적 소명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하였다.
1967년 9월, 스테파노 주교는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제1차 정기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신자와 비신자의 관면혼 허용을 관철시켰다. 같은 해 12월에는 강화도 심도직물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회원들이 합법적으로 결성한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노동 청년회 총재로서 여기에 적극 개입하였다. 이때 스테파노 주교의 건의로 임시 주교회의가 개최되었고, 1968년 2월 9일에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인권과 사회 정의를 위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발언이었다.
◇ 서울대교구장 임명과 추기경 서임
1968년 4월 어느 날,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는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Ippolito Rotoli) 대주교로부터 전갈을 받고 급히 상경하였다. “축하드립니다. 교황 성하께서 스테파노 주교님을 대주교로 승품하는 동시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이었다. 마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는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물었다. ‘주님,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를 들려 낯선 타향으로 저를 보내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황 바오로 6세의 칙서는 1968년 4월 9일 자였다. 스테파노 대주교는 우선 사목 표어를 정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한글 표현만 조금 바꾸고 주교 서품 때의 표어를 그대로 잇기로 하였다.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은 5월 29일 명동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스테파노 대주교는 취임 미사 강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1968년 10월 6일, 스테파노 대주교는 로마에서 거행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에 참석하여 교황 바오로 6세와 함께 미사를 집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성탄을 앞두고 발표한 메시지에 이러한 구절을 넣었다.
대주교로 승품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스테파노 대주교는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추기경의 명의는 ‘San Felice da Cantalice a Centocelle’. 당시 그의 나이 47세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추기경이요, 전 세계 130여 명의 추기경 가운데 가장 젊은 추기경이었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새로 서임된 추기경은 모두 33명으로, 독일 유학 시절의 은사였던 요제프 회프너 추기경도 함께였다. 이어 5월 1일에는 교황 성하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추기경 서임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구현하다.
스테파노 추기경이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 7년 동안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배우면서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공의회를 개최한 교황 요한 23세(재위 : 1958~1963년)의 가르침은 물론 독일 사제들과의 담론을 통해 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에는 공의회 소식을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어떻게 변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마산교구장 취임 때에는 “우리 교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쇄신과 사목 정신을 최선을 다해 신부들과 수도자, 신자들의 협동 하에 구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7]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때 ‘세상 속의 교회’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1967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신자와 비신자의 관면혼 허용을 관철시킨 일,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적극 개입한 일도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사회 정의 구현에 노력한 일면이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 아래 “언제나 세상에 열려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8] 이에 대한 그의 기본 정신은 다음과 같은 의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한국 사회는 군사 독재 정권의 야욕에 빠져들고 있었다. 1974년 7월 6일에는 불법 단체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젊은 사제들은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을 결성하였다. 1974년 10월 9일 혜화동 신학교에서 열린 전국 성년 대회는 정권 규탄 시위로 변하였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와 개신교 합동 기도회에서는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 구국 선언문’이 발표되고 관련자들이 구속되었다. 이어 1978년 7월 6일에는 전주에서 경찰이 사제들을 구타하고 길에 유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사태 해결에 노력하면서 군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장기 집권하던 대통령이 살해된 뒤 또다시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그 이듬해 5월 18일부터 광주 시민들은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민주화 운동은 1987년 1월 14일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숨진 것을 은폐하려고 한 사건이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이틀 뒤의 미사 강론에서 정권의 야만성을 소리 높여 비난하였다.
1987년 6월 10일에는 군사 정권 규탄 대회를 마친 학생과 시민 수백 명이 경찰에 밀려 명동대성당 경내로 들어왔다. 경찰이 강제 연행 방침을 굳히자 스테파노 추기경이 여기에 맞섰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11] 추기경의 단호한 어조에 경찰은 학생들의 귀가를 보장하며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처럼 스테파노 추기경은 암울한 현실 아래에서 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언제나 군사 정권의 강압 통치와 인권 유린에 항거하였고, 그의 행동은 군사 정권의 전횡을 막고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
사실 그는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정치적 목적에서 한 일은 더더욱 없었다.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한 일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12]
◇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의 벗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에서 본 것처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일찍부터 노동자들의 인권과 사회 정의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1978년에는 인천 동일방직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들의 권익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다.
1979년 여름에는 경북 영양에서 ‘오원춘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에서 가톨릭 농민회 회원인 오원춘(吳元春) 알폰소를 납치해 폭행한 사건이었다. 이에 안동교구에서는 항의 집회를 열었고, 경찰에서는 신부들을 구속하고 가톨릭 농민회를 탄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스테파노 추기경은 즉시 안동으로 내려가 정부의 농민 운동 탄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울 양평동 철거민들을, 1986년에는 상계동 철거민들을 돕고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대구 지하철 화재 현장을 찾아 유가족과 아픔을 나누었다. 쓰레기 매립장인 난지도, 성매매 여성들의 쉼터인 막달레나의 집 등지를 방문하여 위로하고, 장애인과 광부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용기가 없어서 그들과 함께 살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남북 분단을 가슴 아파하며 억압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도 늘 기도하였다. 1975년 6월 10일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뒤에는 자주 북한 교회와 동포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곤 하였다. 1989년의 서울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때는 북한 신자들을 초청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었고, 1995년에는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여 북한의 복음화와 동포 지원 사업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13]
스테파노 추기경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자 대변인이 되고자 하였다. 그것이 교회의 현실 참여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1970~1980년대의 격동기를 헤쳐 나가는 동안 스테파노 추기경이 늘 자신에게 되묻곤 하던 질문이자 기도였다.
◇ 착한 목자요 깨어 있는 지성, 겸손한 바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98년 4월 3일 서울대교구장에서 퇴임하였다. 추기경으로 서임된 지 30년, 사제가 된 지 47년 만이었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1코린 4,11) 있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중심에는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다.
그는 2007년에 그린 자화상 옆에 ‘바보야’라고 적었다. ‘하느님이 사랑과 진실임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아서 그렇다.’는 겸손한 표현이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87세로 선종하였다. 그는 사후에 안구를 기증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두 사람에게 빛을 주고 2월 20일 장례미사 후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5일 동안의 장례 기간 동안 그의 유해가 안치된 명동대성당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추모 행렬이 길게 이어졌으며, 조문객은 교회 안팎을 합쳐 40만 명을 상회하였다. 이처럼 그는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전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은 종교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살았던 착한 목자요, 깨어있는 지성이었다. <마침>
- [1]김수환 추기경 구술, 김원철 정리,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평화방송⋅평화신문, 2009, 50~56면. 이하의 내용은 주로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으며, 특별한 경우에만 출처를 표기하였다.
- [2]〈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 《평화신문》 제726호, 2003년 6월 1일 ; 위의 책, 64면.
- [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2⋅14, 《평화신문》 제735⋅737호, 2003년 7월 30일, 8월 24일 ; 위의 책, 123⋅135면.
- [4]김수환 추기경 전집 편찬위원회, 《김수환 추기경 전집 17 ‘말씀의 이삭’》, 가톨릭출판사, 2001, 250~251면.
- [5]〈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6, 《평화신문》 제749호, 2003년 11월 23일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211면.
- [6]〈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8, 《평화신문》 제749호, 2003년 12월 7일 ; 위의 책, 218면.
- [7]위의 책, 175~176면, 190~195면.
- [8]《김수환 추기경 전집 15 ‘이 시대를 사는 목자 1’》, 92~95면, 307~312면, 468~473면, 650~651면.
- [9]《김수환 추기경 전집 12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 403면.
- [10]〈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4, 《평화신문》 제777호, 2004년 6월 13일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368면.
- [11]〈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4, 위와 같음 ; 위의 책, 370면.
- [12]〈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7, 《평화신문》 제760호, 2004년 2월 15일 ; 위의 책, 271면.
- [13]《가톨릭시보》 제1084호, 1977년 12월 11일 ; 《김수환 추기경 전집 15 ‘이 시대를 사는 목자 1’》, 600~601면, 6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