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 <약전(大)>
(1922~2009)
◇ 탄생과 소년 시절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윤음; 양력 7월 2일) 대구(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225-1)에 거주하던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아 세례 때 받은 세례명은 스테파노,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훗날에 택한 아호는 ‘옹기’다. 옹기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소박한 그릇인 데다가 박해기 이후로 오랫동안 복음 전파의 수단이 되어 왔고, 그 자신이 옹기장이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붙여준 본래 이름은 ‘수한(壽漢)’이었으나 출생 신고서에 ‘수환’으로 잘못 기록되면서 이것이 그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스테파노의 집안에서 처음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조부인 김요안(金要安)이었다. 그러나 조부 요안이 언제 천주교에 입교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병인박해 때인 1869년 충청도 연산(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체포되어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순교하였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 요안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석방되었고, 이후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출산했으니 그가 곧 스테파노의 부친 김영석 요셉이다.
이렇게 유복자로 태어난 요셉은 어렵게 살면서도 수계생활에는 충실하였다. 또 장성한 뒤에는 옹기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경상도 칠곡에 정착한 뒤 달성(達城) 서씨 집안의 돈독한 신자인 마르티나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후 그는 처가가 있는 대구로 이주해 살았는데, 일제 당국의 규제가 심해지면서 옹기점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요셉과 마르티나 부부가 막내 김수환 스테파노를 얻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스테파노가 서너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은 자식들을 데리고 선산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다섯 살 때는 다시 군위로 이주하여 옹기점을 운영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당시 군위에서는 스테파노의 큰 누님이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후 부친 요셉은 자신의 집을 공소로 제공하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막내 스테파노가 군위공립보통학교 1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폐 질환으로 선종하였다. 그러면서 스테파노의 가족은 더없이 어렵게 생활해야만 하였고, 모친 마르티나는 옹기장수, 포목 행상 등으로 많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친은 자식들의 신앙 교육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곧은 성품 그대로 엄하게 자식들을 키웠다.
그때 어린 스테파노에게는 세 살 위의 형인 동한(東漢) 가롤로가 있었다. 나이 차이가 많던 다른 형과 누나들은 일찍 객지로 나가거나 출가했지만, 형 가롤로와는 어릴 때부터 같이 생활하면서 유달리 정이 깊었다. 그러던 형이 군위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예비과에 입학하면서 스테파노는 모친과 함께 단둘이 생활하게 되었다. 형 가롤로가 신학교 예비과에 들어가게 된 것은 ‘사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모친의 간곡한 희망에 따른 것이었는데, 모친은 막내 스테파노에게도 이러한 희망을 걸고 있었다.
특히 모친의 기도생활은 한결같았다. 기도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었다. 모친은 스테파노에게 성경이나 옛 성인 이야기, 우리나라 고전 중의 하나인 효자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으며, 이러한 모친의 말씀은 엄격한 교육과 함께 스테파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그가 지니고 있던 꿈은 사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장사하는 방법을 배워 독립하는 것이었고, 적당한 나이가 되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친의 희망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꿈을 드러내놓고 모친께 말씀드리지는 못하였다. [1]
◇ 신학생의 길, 그리고 사제 서품
1934년 4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김수환 스테파노는 군위보통학교 5학년을 마치고 형이 다니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예비과 5학년으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기도와 규율을 지켜야 하는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자신의 꿈 때문이 아니라 모친과 형에게 등 떠밀려 들어간 신학교 생활이었기에 재미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한번은 학교에서 나가보려는 마음을 갖고 동전 하나를 사용하여 ‘돈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신학교 규칙을 어긴 것처럼 꾀를 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구 신학교에서 예비과 2년을 마친 스테파노는 1936년 4월 서울의 소신학교 즉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의 갑조(甲組)는 일반 중등학교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사제의 길에 확신을 갖지 못했던 그는 신학교에서 쫓겨나려고 꾀병을 부리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되면서 스테파노는 요한 보스코 성인전과 성녀 소화 데레사 전기 등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성인들의 신앙 생애에서 많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스테파노가 사제의 길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이들 성인전이었다. 특히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 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다고 사제의 길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세심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자기와 같이 부족한 사람은 사제가 될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까지 들었다. 결국 스테파노는 고해 사제인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안토니오) 신부를 찾아가 신학교에서 나가겠노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공베르 신부는 스테파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를 격려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사제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여전히 일제 강점기 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 학교인 갑조의 평신도 교사들이 수업에 들어오면 은연중에 민족혼을 일깨우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스테파노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라를 빼앗겨 신음하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울분이 치솟아 오르곤 하였다. 5학년 졸업반 수신(修身, 지금의 윤리) 과목 시험 때의 일이었다. 황국(皇國, 즉 천황의 나라 일본) 신민으로서의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지를 받은 그는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답을 썼다가 교장 선생님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기도 하였다. [3]
1941년 3월에 소신학교를 졸업한 스테파노는 그해 4월 일본 도쿄에 있는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9월 문학부 철학과로 진학하였다. 대구대목구장 무세(G. Mousset, 文濟萬 제르마노) 주교의 신학생 양성 방침에 따른 것이다. 이 대학 시절 스테파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예수회 선교사이자 스승인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4]신부였다. 게페르트 신부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던 스테파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1944년 1월 스테파노가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자 무사 귀환을 위한 기도를 드려주기도 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시기였다.
학도병으로 징집된 스테파노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섬 지치지마(父島)에 배치되었으나, 이듬해인 1945년에 전쟁이 끝나면서 학도병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해에 그는 미군 측의 요청에 따라 괌에서 있은 전범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했다가 9월에 도쿄로 귀환하였고, 1947년 1월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유학을 떠난 지 거의 6년 만이었다. 이에 앞서 그의 형 가롤로는 1945년 12월 15일 대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부산 범일 본당 보좌로 부임하였다.
스테파노는 귀국 후 잠시 대구 집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다시 한 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래서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로 재임하던 장병화(張炳華) 요셉 신부에게 자신의 결점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하였다. 이때 요셉 신부는 한 달을 고민한 끝에 그를 불러서 “사제는 모름지기 자신의 약점이 뭔지 알아야 해. 그래야 그걸 이겨내고 성덕을 쌓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꼭 사제가 돼야 하네.”라고 하면서 오히려 신학교 복학을 권하고 격려해 주었다.
1947년 9월 스테파노는 서울의 대신학교인 성신대학으로 편입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신학생들이 성경 다음으로 애독하던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n of Christ)」을 끼고 살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신학교 생활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삭발례(削髮禮)였다. 그때에는 삭발례가 성직에 오르는 첫 번째 관문이었는데, 그날의 예식 말씀 중에서 “야훼 하느님은 나의 유산이다.”라는 구절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신학생으로서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5]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마침 그날은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 온 스승 공베르 신부의 사제 서품 금경축 기념일이어서 총급장(지금의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스테파노는 정성껏 행사를 준비하였다. 전쟁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행사가 끝난 뒤부터였다. 사실 며칠 전부터 그는 로마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계획은 전쟁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6월 27일 밤, 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밀고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은 스테파노는 동료, 후배 신학생들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갔다가 뿔뿔이 흩어져 피란길에 올라야만 하였다. 수원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다음해 6월까지 영도의 임시 신학교에서 대구대목구장 최덕홍(崔德弘) 요한 주교에게 사제가 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수업을 받았다. 5년 후배인 정하권(鄭夏權) 플로리아노와 함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 주교가 그 둘을 불렀다. “이제 사제품을 받을 준비를 하게. 날짜는 둘이 상의해서 잡아보도록 하게.”
1951년 9월 15일, 그날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이었다. 이날을 사제 서품일로 잡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묵묵히 뒤따르는 것이 사제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날인 9월 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고, 다음날인 9월 16일은 한국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일이어서 사흘 연속 큰 의미가 이어져 있었다. 사제 서품 장소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 이때 스테파노 신부가 서품 성구로 정한 것은 시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3) [6]
◇ 짧았던 본당 사목과 독일 유학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는 사제 서품 후 안동 본당(현 목성동 주교좌 성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첫 임지에서 그의 눈에 먼저 밟힌 것은 주민들의 가난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에다 두 해 연속 이어진 흉년으로 인해 그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특히 읍내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상황이 더욱 심각하였다.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 스테파노 신부는 며칠을 궁리한 끝에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 편지를 들고 부산으로 메리놀외방선교회의 조지 캐롤(George M. Carroll M.M., 안 제오르지오) 몬시뇰을 방문하였다. 몬시뇰이 미국 가톨릭 구제회의 한국 지부장으로 있었으므로 하다못해 밀가루라도 얻어서 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스테파노 신부의 생각과는 다르게 몬시뇰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거액의 수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최덕홍 요한 주교에게 전달해 달라는 편지와 함께……
교구장 요한 주교는 몬시뇰의 편지를 읽고 나서 스테파노 신부에게 절반을 떼어주었다. 그것도 생각할 수 없이 큰돈이었다. 안동으로 돌아온 스테파노 신부는 그때부터 성당 보수 작업을 시작하면서 일하러 오는 주민들에게 후한 품삯을 주었다. 또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공소 신자들에게는 고해소 안에서 형편에 따라 현금을 건네주고는 반드시 비밀을 지키도록 못을 박곤 하였다.
스테파노 신부는 예비 신자와 교리 지식이 부족한 신자들을 위해 매일 저녁 교리반을 열었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요청해 오면 마다하지 않고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래야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쯤 그는 대목구장 비서로 임명되었다. 1953년 4월이었다. 교우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대구로 부임한 그는 자임해서 고등학생 단체의 지도 신부를 맡았고, 이후에는 대목구 재경부장과 해성병원 원장까지 겸하였다. 1954년 12월 14일, 최덕홍 요한 주교가 선종하자 그는 상주(喪主)가 된 심정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 다음해 3월 사순시기 둘째 영복날(영광의 날). 그러니까 신자들이 말하는 묵주기도 첫 영복날인 수요일에 이어 두 번째 영복날인 토요일이었다. [7] 스테파노 신부는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으신 모친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에 “나는 사순절 둘째 영복날에 죽으련다.”고 자주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모친께서는 중풍에 걸려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남산동 성당으로 가서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그날 저녁에 선종하셨다. 당시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는 ‘사순절 둘째 영복날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그의 모친께서도 이를 믿으셨던 것 같다.
1955년 6월, 스테파노 신부는 김천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부임 뒤에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성의중⋅상업고등학교 교장도 자연스레 맡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장이란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냈고, 그래서였는지 언제부터인가 학생들로부터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웃을 때면 코가 벌렁거린다는 이유였다. [8]
그렇게 1년 남짓 사목한 그는 1956년 7월 독일로 떠나 10월부터 유학생활에 들어갔다. 수학 장소는 뮌스터(Münster) 대학, 전공과목은 ‘그리스도교 사회학’이었고, 지도 교수는 요제프 회프너(Joseph Höffner) 신부였다. 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고 쾰른 대교구장을 역임한 분이다. 회프너 교수는 스테파노 신부가 사회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도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 유학 중에 그는 이국 멀리까지 와서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이들은 미사와 고해성사는 물론 일상에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곤 하였다. 평소에도 어려운 사람을 볼 때마다 가만히 있지 못하던 그였으므로 웬만하면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1962년 여름, 스테파노 신부는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지도 교수인 요제프 회프너 신부가 뮌스터 교구장에 임명되어 학교를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후임 지도 교수는 배정되지 않았고, 학위 논문을 쓰는 일도 버거웠다. 고민 끝에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해서 사목하는 게 낫겠다 싶어 대구의 서정길(徐正吉) 요한 대주교에게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1963년 11월 귀국 길에 올라 로마와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 등을 순례하고 이듬해 5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9]
◇ 초대 마산교구장 임명과 주교 서품
1964년 6월 5일 스테파노 신부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처음 접하는 언론 사업이었지만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동안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다. 훗날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고 술회하였다. [10]
1966년 3월. 스테파노 신부는 주한 교황사절 안토니오 델 쥬디체(Antonio del Giudice) 대주교로부터 ‘한번 만나고 싶으니 서울로 오면 좋겠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상경하였다. ‘무슨 일일까?’ 상경하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과 같이 쥬디체 대주교는 뜻하지 않은 소식을 그에게 전했다. “교황 바오로 6세(재위 : 1963~1978년) 성하께서 1966년 2월 15일 자로 부산교구에서 마산 지방을 분리하여 새 교구로 신설하셨네. 동시에 당신을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셨다네.”
스테파노 주교는 성하의 결정을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과 의논하여 서품 날짜를 잡았다.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지금은 8월 22일)이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사제로 태어났던 것을 기억하면서 5월 성모성월 마지막 날에 주교로 태어나고 싶었다. 사목 표어는 성찬례 성혈 축성 경문에서 인용한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고 정했다. [11]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 몸과 피를 내어 주신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서품식 및 마산교구장 착좌식 장소는 마산 완월동에 있는 성지여자중고등학교 운동장, 주례는 쥬디체 대주교였다. 신자 수 3만 명, 본당 21개의 시골 교구를 이끌어가는 교구장 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스테파노 주교는 될 수 있으면 본당을 자주 방문하였다. 시골 성당에 가서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신자들을 만나면 ‘평신도와 사제, 수도자는 모두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그들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평신도가 참여하는 사목 협의회를 결성하고 사제 평의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1967년 9월, 스테파노 주교는 서울대교구장 서리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를 대신하여 가톨릭 신앙의 보전 문제를 의제로 한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제1차 정기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 간의 혼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에 맞섰고, 끝내는 신자와 비신자의 관면혼 허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선교 지역인 한국 교회와 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신자와 비신자의 혼인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것이다. 이는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는 그의 꿈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 발생하였다. 심도직물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합법적으로 결성한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인근의 다른 사주들과 함께 천주교 신자 노동자들을 해고한 사건이었다. 당시 가톨릭 노동 청년회 총재를 겸하고 있던 스테파노 주교는 사태의 전말을 파악한 뒤, 인천교구장 맥노튼(William John McNaughton, 羅吉模 굴리엘모) 주교와 의논하여 임시 주교회의를 개최하도록 주교단에 건의하였다. 그 결과 1968년 2월 9일에는 임시 주교회의에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성명서〉가 발표되었으니, 이는 인권과 사회 정의를 위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발언이었다. 이 성명서 발표 후 정부에서도 적극 수습에 나섬으로써 해고자 전원이 복직되었다. [12]
◇ 서울대교구장 임명과 추기경 서임
심도직물 사태가 해결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 1968년 4월 어느 날.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Ippolito Rotoli) 대주교로부터 전갈을 받은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는 급히 상경하였다. “축하드립니다. 교황 성하께서 스테파노 주교님을 대주교로 승품하는 동시에 제11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더라도 이제 주교로 서품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막내 주교가 짊어질 만한 십자가는 아닌 듯싶었다. 마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물었다. ‘주님, 감당키 어려운 십자가를 들려 낯선 타향으로 저를 보내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황 바오로 6세의 칙서는 1968년 4월 9일 자였고, 발표는 4월 27일 오후에 로마와 한국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스테파노 대주교는 우선 사목 표어를 정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주교 서품 때의 표어를 원문의 한글 표현만 조금 바꾸고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고향과 같은 마산교구를 떠나는 날, 그는 신부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은 5월 29일 명동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스테파노 대주교는 취임 미사 강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스테파노 대주교는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 지 4개월 후인 1968년 10월 6일 로마에서 거행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에 참석하여 교황 바오로 6세와 함께 시복 미사를 집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성탄을 앞두고 발표한 메시지에 이러한 구절을 넣었다.
다음해인 1969년 3월, 스테파노 대주교는 로마 회의에 갔다가 미국을 거쳐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쿄에 내린 김에 조치대학으로 스승 게페르트 신부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를 타려고 막 숙소에서 나가려고 할 즈음, 스승 게페르트 신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축하합니다. 대주교님이 추기경이 되셨어요. 여기 신문에 났어요.” 그는 수화기를 든 채로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대주교로 승품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김수환 스테파노 대주교는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추기경이요, 전 세계 130여 명의 추기경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추기경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란 현수막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그는 현실을 실감하면서 ‘무엇보다도 한국 천주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뻤노라.’고 훗날 술회하였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새로 서임되는 추기경은 모두 33명으로, 독일 유학 시절의 은사였던 요제프 회프너 추기경도 함께였다. 지정 장소인 우르바노 대학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교황 특사가 임명장을 들고 와서 전달하였고, 5월 1일에는 교황 성하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추기경 서임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의 명의는 ‘San Felice da Cantalice a Centocelle’였다. [15]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구현하다.
스테파노 추기경이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 7년 동안 스승 요제프 회프너 신부에게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배우면서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독일로 파견되어 온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과 교류하면서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을 실천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천주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독일 사제들과의 교류와 공의회에 관한 담론은 훗날 세상 속에 살아가는 교회를 꿈꾸고 실천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으며, 사제로서, 그리고 훗날 주교와 추기경의 소임을 수행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교황 요한 23세(재위 : 1958~1963년)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변화와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 세상 및 타종교와 대화하는 교회상을 추구한 분이다.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교회를 이끈 교황이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담은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어머니요 스승(Mater et Magistra)〉 등을 발표하고, 교회 쇄신을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공의회의 정신은 물론 이러한 교황의 가르침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일하는 동안 공의회 소식을 보도하는 일만큼은 사명감을 갖고 임하였다. 그는 공의회의 정신을 올바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국 교회가 어떻게 변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유명한 스님과 목사, 그리고 사회 명사들에게 ‘천주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루빨리 고쳐야 할 단점은 무엇인지?’ 등을 질문하고, 그들이 보내준 비판적인 답장을 그대로 신문에 게재하였다. [16]
마산교구장 취임 때에는 “우리 교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쇄신과 사목 정신을 최선을 다해 신부들과 수도자, 신자들의 협동 하에 구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공의회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때 ‘세상 속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 아래 “언제나 세상에 열려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7]
1967년의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제1차 정기회의에서 신자와 비신자의 관면혼 허용을 관철시킨 일이나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적극 개입하여 수습한 일도 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모두가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사회 정의 구현에 노력한 단면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스테파노 추기경의 기본 정신은 다음과 같은 의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한국 사회는 군사 독재 정권의 장기 집권 야욕에 빠져들고 있었다. 1971년 12월 6일에는 국가 비상사태가 선언되고, 12월 17일에는 국회에서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 조치법’이 통과되면서 대통령에게 비상 대권이 부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움츠러들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고자 한 사람이 스테파노 추기경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표 방송사인 한국방송공사(KBS)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된 1971년 성탄 자정 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심각하게 변하고 있었다. 1972년 정부에서는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곧이어 경제 안정과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8⋅3 긴급 재정 명령’을 발표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스테파노 추기경은 남북 공동 성명을 1인 장기 집권 체제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긴급 재정 명령을 전형적인 정경 유착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그는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여 정부의 성명에 대한 부당성과 위험성을 지적하고, 자유 민주주의 실현을 촉구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군사 정권에서는 국회 해산 및 정당⋅정치 활동 정지 등에 관한 특별 선언을 발표함과 동시에 비상조치를 선포하였다. 이른바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 즉 유신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스테파노 추기경은 노골적으로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74년 7월 6일에는 불법 단체에 자금을 댔다는 이유로 해외에서 귀국하는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테파노 추기경은 즉시 대통령에게 단독 면담을 요청하였고,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을 통해 유신 헌법을 비판한 뒤 다시 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젊은 사제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같은 해 10월 9일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서 열린 전국 성년 대회는 헌정 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유신 정권 규탄 시위로 변하였다. 이때 앞장서서 거리 진출을 시도한 것이 천주교 주교단이었다. 당시 회의차 로마에 머물던 스테파노 추기경은 한국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에게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주교들까지 거리에 나와야 했는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하면서 “지금 한국에는 인권과 정의가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20]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와 개신교 합동 기도회에서는 유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 구국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로 인해 관련 인사 11명이 구속되고 천주교 사제 5명도 구속 또는 불구속되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은 광범위하게 시국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럴수록 정부에서도 교회 탄압의 강도를 강화하였다. 한편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보수 성향의 사제들은 별도로 ‘구국 사제단’을 구성하여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주교회의에서도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평가를 두고 찬반이 나뉘어졌다.
사실 스테파노 추기경 자신은 정치적으로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치적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 앞에 나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스테파노 추기경은 교회가 좌⋅우로 나뉘고, 진보와 보수로 분열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는 1976년의 ‘3⋅1 명동 사건’과 관련하여 열린 3월 15일의 시국 기도회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1978년에는 ‘전주 7⋅6 사태’가 발생하였다. 전주에서 경찰이 문정현(文正鉉) 바르톨로메오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성당에 난입한 뒤 신부들을 구타하고 그중 한 명을 길에 유기한 사건이었다. 사건 이후 전주교구 사제단이 내무부 장관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스테파노 추기경은 전주로 내려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22]
1979년 10월 26일 장기 집권하던 대통령이 부하의 손에 살해된 뒤 군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12⋅12 군사 반란이었다. 그 이듬해 5월 18일부터 광주 시민들은 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며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 비폭력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7년 1월 14일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숨진 것을 은폐하려고 한 사건이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1월 26일에 봉헌된 미사 강론에서 정권의 야만성을 소리 높여 비난하였다.
이 사건의 실체는 5개월 뒤인 5월 17일에 열린 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 미사 때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金承勳) 마티아 신부에 의해 낱낱이 폭로되었다. 1987년 6월에는 군사 반란의 또 다른 주역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군사 정권 규탄 대회는 연일 계속되었고, 6월 10일에는 규탄 대회를 마친 학생과 시민 수백 명이 경찰에 밀려 명동대성당 경내로 들어갔다. 같은 날 젊은 신부 40여 명은 나라를 위한 시국 미사를 봉헌한 뒤 성당에 남아 시한부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겠다는 방침을 굳히자 스테파노 추기경이 이에 맞섰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24]
추기경의 단호한 어조에 경찰은 학생들의 귀가를 보장하며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명동대성당은 상고시대에 죄인이 피신해도 끌어낼 수 없는 공간이었던 소도(蘇塗)와 같은 성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며칠 뒤 군인 출신 대통령 후보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스테파노 추기경은 군사 정권이 들어선 이후 자행된 강압 통치와 인권 유린에 맞서 미사 강론과 메시지, 시국 담화문 등을 통해 항거하였다. 그의 목숨을 건 행보는 통치자들의 전횡을 막고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 그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이는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25]
◇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 모든 종교인들의 벗
1967년의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에서 본 것처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일찍부터 노동자들의 인권과 사회 정의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1978년에 인천 동일방직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이들을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루카 10,25-37)이라고 여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다. 8월 20일에는 명동대성당에서 기도회를 열고 노동자들의 인권 탄압을 중지하라는 성명도 발표하였다.
1979년 여름에는 경북 영양에서 ‘오원춘 사건’이 발생하였다. 가톨릭 농민회 회원인 오원춘(吳元春) 알폰소가 군청에서 알선한 불량 씨감자를 심어 피해를 입은 뒤 그 보상을 받아냈는데, 경찰에서 농민들의 피해 보상 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그를 납치해 폭행한 사건이었다. 이에 안동교구에서 항의 집회를 열자 경찰에서는 신부들을 구속하고 가톨릭 농민회를 탄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스테파노 추기경은 즉시 안동 성당으로 내려갔고, 그 자리에서 정부의 농민 운동 탄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26]
스테파노 추기경은 1970년대 서울 양평동의 철거민들이 경기도 시흥으로 이주할 때,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알선해 주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상계동 철거민들의 집터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명동대성당 한쪽에 천막을 치고 살도록 배려하였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때에는 현장을 찾아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과 아픔을 나누었으며, 외국인 산업 연수생 노동자들을 찾아가 미사를 집전하고 ‘외국인 노동자 보호법’ 제정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한 일도 있었다. 쓰레기 매립장인 난지도와 성매매 여성들의 쉼터인 막달레나의 집, 베트남 난민 보호소 등지를 방문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고, 장애인과 광부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용기가 없어서 그들과 함께 살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였다. [27]
스테파노 추기경은 남북 분단과 대치 상황을 가슴 아파하며 화해와 평화를 강조하였고, 억압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늘 기도하였다. 미사 파견 예식에서 신자들을 향해 축복하는 세 번째 십자 표시는 늘 북한 교회와 동포들을 향해 있었다. 1975년 6월 10일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되면서 그러한 생각은 더욱 간절해졌다. 같은 해의 한국전쟁 기념일에는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는 첫 메시지를 발표하였고, 1977년 평양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미사 강론을 통해 북한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28]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에 북한 신자들을 초청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으며, 1992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방북 의사를 밝혔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29] 1995년에는 북한의 복음화와 동포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전담하는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와 타종교인의 벗이 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한 이듬해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성공회 주교와 합동 기도회를 열었으며, 1970년에 불교 스님과 개신교 목사와 대담한 것을 시작으로 타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시국 현안에 대한 종교간 대화와 협력 방안을 논의하였다. [30] 1972년에는 YWCA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강론을 하였고, 1973년에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하여 캔터베리 대주교를 만났다. [31] 1984년에는 불교 스님을 명동대성당에 초청해 특강을 들었으며, 1997년에는 불교 사찰의 개원식에 참석해 기념 축사를 하였다. 그리고 2000년에는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심산상을 수상한 뒤 당사자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기도 하였다. [32]
한편 1989년의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스테파노 추기경이 설립한 ‘한마음 한몸 운동 본부’에서는 지금까지 국내외 원조 사업과 백혈병 어린이 돕기, 골수와 제대혈과 장기 기증, 국내 입양 운동 등을 전개해 오고 있다. 2002년 북한 선교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서울대교구에서 설립한 ‘옹기 장학회’는 그 대상을 아시아 전체로 확대하여 장학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언제나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인권과 정의를 부르짖곤 하였다. 그는 이념의 투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소외된 약자들의 벗이자 대변인이 되고자 하였다. 절망적인 현실에 처한 노동자들, 차별받는 외국인 노동자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빈민들, 도시 개발로 강제 이주당해야만 하는 철거민들, 산업화에 따른 이농으로 힘든 농민들, 교도소에 갇힌 양심수와 죄수들, 냉대 받고 소외당하는 장애인들, 그리고 억압당하면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고통을 함께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현실 참여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는 1970~1980년대의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스테파노 추기경이 늘 자신에게 되묻곤 하던 질문이자 기도였다.
◇ 착한 목자요 깨어 있는 지성, 겸손한 바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98년 4월 3일 서울대교구장에서 퇴임하고 6월 22일 명동대성당에서 송별 미사를 봉헌하였다. 추기경으로 서임된 지 30년, 사제가 된 지 47년 만이었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독재와 억압으로 얼룩진 정치 상황을 거치면서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1코린 4,11) 있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제 천주교 신자 수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1.3%까지 증가하였다. [33] 평신도들의 손으로 세운 기적과 같은 교회가 보편 교회의 자랑스러운 지체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에는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다. 그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에 군사 정권의 억압에 항거하면서 사회 정의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부당하게 억눌리거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대변인이 되어 인권 옹호를 앞장서서 외쳤으며,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고 나눔을 실천하였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억압에 굴복하지 않은 그의 솔직하고 강직한 성품은 한국 사회 안에서 천주교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 타이완, 필리핀 등지의 대학에서 갖가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2007년에 그린 자화상 옆에 ‘바보야’라고 적었다. 하느님이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아서 그렇다는 겸손한 표현이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2010년에 이 바보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을 계승하기 위해 ‘바보의 나눔’ 재단을 설립한 뒤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다. 또 이 해에 가톨릭대학교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연구소’를 설립하여 그의 삶과 가르침을 학술적으로 조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2017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그의 고향인 경북 군위에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을 세워 추기경의 삶을 기리고 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에 87세로 선종하여 2월 20일 장례미사 후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후에 안구를 기증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두 사람에게 빛을 주었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년 7만명 가량이었던 장기 기증 신청자가 그해에는 18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5일 동안의 장례 기간 동안 추기경의 유해가 안치된 명동대성당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추모 행렬이 길게 이어졌으며, 조문객은 교회 안팎을 합쳐 40만 명을 상회하였다. 사도의 후계자로 살아온 그의 덕성과 명성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그는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전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은 종교 지도자였으며, 시대의 어른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살았던 착한 목자이자 깨어있는 지성이었다. <마침>
- [1]김수환 구술, 김원철 정리,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평화방송⋅평화신문, 2009, 50~56면.
- [2]위의 책, 57~64면.
- [3]위의 책, 65~71면.
- [4]게페르트(1904~2002) :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1954년에 내한하였으며, 1960년 4월 18일에 개교한 서강대학교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 [5]《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80~97면, 109~123면.
- [6]위의 책, 125~135면.
- [7]당시의 신자들은 묵주기도 묵상 주제인 환희⋅통고(고통)⋅영복(영광)을 각각의 요일에 붙여 불렀다. 즉, 월요일을 ‘첫 환희’, 화요일을 ‘첫 통고(고통)’, 수요일을 ‘첫 영복(영광)’, 목요일을 ‘둘째 환희’ 등으로 부른 것이다.
- [8]《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138~143면, 148~158면.
- [9]위의 책, 163~172면.
- [10]위의 책, 173~176면.
- [11]김수환 추기경 전집 편찬위원회, 《김수환 추기경 전집 17 ‘말씀의 이삭’》, 가톨릭출판사, 2001, 250~251면.
- [12]《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186~203면.
- [13]위의 책, 211면.
- [14]위의 책, 218면.
- [15]위의 책, 206~211면, 223~227면, 230~235면.
- [16]위의 책, 168~177면.
- [17]위의 책, 190~195면, 211면.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스테파노 추기경의 인식은 〈교회가 사회 문제에 침묵할 수 없는 이유〉, 〈사회 속에서 종교의 역할〉, 〈교회의 현실 참여〉, 〈생명 우리의 평화〉 등에 대한 설명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김수환 추기경 전집 15 ‘이 시대를 사는 목자 1’》, 92~95면, 307~312면, 468~473면, 650~651면).
- [18]《김수환 추기경 전집 12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 403면.
- [19]〈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8, 《평화신문》 751호, 2003년 12월 7일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219면.
- [20]위의 책, 248~270면.
- [21]위의 책, 282~283면.
- [22]위의 책, 288면.
- [23]위의 책, 368면.
- [24]위의 책, 370면.
- [25]〈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7, 《평화신문》 제760호, 2004년 2월 15일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271면.
- [26]위의 책, 291~300면.
- [27]〈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1, 《평화신문》 제774호, 2004년 5월 23일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평화신문》 제921호, 2007년 5월 20일.
- [28]《김수환 추기경 전집 12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 333~335면 ; 《가톨릭시보》 1084호, 1977년 12월 11일.
- [29]《김수환 추기경 전집 15 ‘이 시대를 사는 목자 1’》, 600~601면, 612면 ; 《김수환 추기경 전집 16 ‘이 시대를 사는 목자 2’》, 81~90면.
- [30]스테파노 추기경의 타종교에 대한 인식은 강원룡 목사와 나눈 〈이 민족에게 희망을〉이라는 대담에 잘 드러나 있다(《김수환 추기경 전집 15 ‘이 시대를 사는 목자 1’》, 99~133면).
- [31]김수환, 〈새 시대를 향한 기독교인의 참여〉, 《가톨릭시보》 813호, 1972년 4월 30일 ; 《가톨릭시보》 859호, 1973년 4월 1일.
- [32]《김수환 추기경 전집 16 ‘이 시대를 사는 목자 2’》, 357~359면 ; 《김수환 추기경 전집 17 ‘말씀의 이삭’》, 328~333면.
- [33]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3,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