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 <약전(中)>
(1922~2009)


◇ 탄생과 소년 시절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윤음; 양력 7월 2일) 대구(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225-1)에 거주하던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아 세례 때 받은 세례명은 스테파노,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훗날에 택한 아호는 ‘옹기’다. 본래 이름은 ‘수한(壽漢)’이었으나 출생 신고서에 ‘수환’으로 잘못 기록되면서 이것이 그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스테파노의 집안에서 처음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조부인 김요안(金要安)이었다. 그는 병인박해 때인 1869년 충청도 연산(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체포되어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순교하였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도 남편 요안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석방되었고, 이후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출산했으니 그가 곧 스테파노의 부친 김영석 요셉이다.


이렇게 유복자로 태어난 요셉은 어렵게 살면서도 수계생활에는 충실하였다. 장성한 뒤에 그는 옹기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달성(達城) 서씨 집안의 돈독한 신자인 마르티나를 아내로 맞이한 뒤 처가가 있는 대구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규제가 심해지면서 옹기점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막내 김수환 스테파노가 태어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스테파노가 서너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은 자식들을 데리고 선산으로 이주하였고, 다섯 살 때 다시 군위로 이주하였다. 이후 부친 요셉은 자신의 집을 공소로 제공하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스테파노가 군위보통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병으로 선종하였다.


이때부터 모친 마르티나는 가족들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면서 어렵게 생활했지만, 자식들의 신앙 교육에는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특히 어린 스테파노와 세 살 위의 형인 동한(東漢) 가롤로에게는 “사제가 되라.”는 희망을 표현하였고, 이러한 희망에 따라 가롤로는 군위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예비과에 입학하였다. 어릴 때 스테파노는 장사하는 방법을 배워 독립한 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겠다는 것이 꿈이었는데, 모친에게는 차마 이러한 꿈을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1]


◇ 신학생의 길, 그리고 사제 서품


1934년 4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김수환 스테파노는 군위보통학교 5학년을 마치고 형이 다니던 성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예비과 5학년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936년 4월에는 서울의 소신학교 즉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의 갑조(甲組)는 일반 중등학교 과정이었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하는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으며, 모친과 형에게 등 떠밀려 들어간 신학교 생활이었기에 재미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사제의 길에 확신을 갖지 못했고, 신학교에서 쫓겨나려고 꾀병을 부리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된 뒤 여러 가지 성인전을 접하면서 스테파노는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가 사제의 길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이들 성인전이었다. 특히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 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하느님은 미미한 존재를 통해서도 당신의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는 분입니다.……기쁨과 고통 등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 사랑에서 나옵니다.” [2]

1941년 3월에 소신학교를 졸업한 스테파노는 그해 4월 일본 도쿄에 있는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9월 문학부 철학과로 진학하였다. 대구대목구장 무세(G. Mousset, 文濟萬 제르마노) 주교의 신학생 양성 방침에 따른 것이다. 대학 시절 스테파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예수회 선교사이자 스승인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3] 신부였다. 게페르트 신부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던 스테파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1944년 1월 태평양전쟁 말기에 그가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자 무사 귀환을 위한 기도를 드려주기도 하였다.


학도병으로 징집된 스테파노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섬 지치지마(父島)에 배치되었으나, 이듬해에 전쟁이 끝나면서 학도병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전범 재판 증언차 괌으로 갔다가 1947년 1월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한편 그의 형 가롤로는 1945년 12월 15일 대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947년 9월 스테파노는 서울의 대신학교인 성신대학으로 편입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신학생들이 성경 다음으로 애독하던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n of Christ)」을 끼고 살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신학교 생활 중에서 삭발례(削髮禮)는 가장 기억에 남는 예식이었는데, 그날의 말씀 중에서 “야훼 하느님은 나의 유산이다.”라는 구절이 아주 감동적이었다. 신학생으로서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수원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영도의 임시 신학교에서 후배 정하권(鄭夏權) 플로리아노와 함께 대구대목구장 최덕홍(崔德弘) 요한 주교 아래서 수학한 뒤, 1951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날을 사제 서품일로 잡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묵묵히 뒤따르는 것이 사제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제 서품 장소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 서품 성구로 정한 것은 시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3) [4]


◇ 짧았던 본당 사목과 독일 유학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의 첫 사목지는 안동 본당(현 목성동 주교좌 성당)이었다. 첫 임지에서 그의 눈에 먼저 밟힌 것은 가난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에 계속된 흉년으로 인해 주민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며칠을 궁리한 끝에 부산으로 미국 가톨릭 구제회의 한국 지부장 조지 캐롤(George M. Carroll M.M., 안 제오르지오) 몬시뇰을 방문하였고, 그에게서 지원금을 받아 안동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성당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일하는 주민들에게 후하게 품삯을 주었으며, 궁핍한 공소 신자들에게는 고해소 안에서 현금을 건네주고는 반드시 비밀을 지키도록 하였다.


스테파노 신부는 예비 신자와 교리 지식이 부족한 신자들을 위해 매일 저녁 교리반을 열었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요청해 오면 마다하지 않고 응해주었다. 그렇게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인 1953년 4월, 그는 대목구장 최덕홍 요한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2월 14일 요한 주교가 선종한 데 이어 1955년 3월 사순 시기에는 모친 마르티나가 선종하는 아픔을 겪어야 하였다.


1955년 6월, 스테파노 신부는 김천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1년 남짓 사목하다가 1956년 7월 독일로 떠나 10월부터 유학 생활을 시작하였다. 김천 본당 재임시에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성의중⋅상업고등학교 교장도 자연스레 맡게 되었는데, 이때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면서 언제부터인가 학생들로부터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웃을 때면 코가 벌렁거린다는 이유였다. [5]


독일에서 유학한 곳은 뮌스터(Münster) 대학이었다. 전공과목은 ‘그리스도교 사회학’이었고, 지도 교수는 요제프 회프너(Joseph Höffner) 신부였다. 회프너 교수는 스테파노 신부가 사회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 여름, 스테파노 신부는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지도 교수인 요제프 회프너 신부가 뮌스터 교구장에 임명되어 학교를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후임 지도 교수는 배정되지 않았고, 학위 논문을 쓰는 일도 버거웠다. 고민 끝에 학위를 포기한 그는 1963년 11월에 독일을 떠나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6]


◇ 초대 마산교구장 임명과 주교 서품


1964년 6월 5일 스테파노 신부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처음 접하는 언론 사업이었지만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동안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다. 훗날 그는 당시를 술회하면서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고 술회하였다. [7]


1966년 3월 어느 날. 스테파노 신부는 뜻하지 않게 주한 교황사절 안토니오 델 쥬디체(Antonio del Giudice) 대주교로부터 ‘한번 만나고 싶으니 서울로 오면 좋겠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상경하였다. ‘무슨 일일까?’ 상경하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과 같이 쥬디체 대주교는 뜻하지 않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교황 바오로 6세(재위 : 1963~1978년) 성하께서 1966년 2월 15일 자로 부산교구에서 마산 지방을 분리하여 새 교구로 신설하셨네. 동시에 당신을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셨다네.”


스테파노 주교는 성하의 결정을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과 의논하여 서품 날짜를 잡았다.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지금은 8월 22일)이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사제로 태어났던 것을 기억하면서 5월 성모성월 마지막 날에 주교로 태어나고 싶었다. 사목 표어는 성찬례 성혈 축성 경문에서 인용한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고 정했다. [8]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 몸과 피를 내어 주신 예수님처럼,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서품식 및 마산교구장 착좌식 장소는 마산 완월동에 있는 성지여자중고등학교 운동장, 주례는 쥬디체 대주교였다. 신자 수 3만 명, 본당 21개의 시골 교구를 이끌어가는 교구장 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평신도와 사제, 수도자는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시대적 소명을 일깨워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평신도가 참여하는 사목 협의회를 결성하고 사제 평의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1967년 9월, 스테파노 주교는 서울대교구장 서리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를 대신하여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제1차 정기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 간의 혼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에 맞섰고, 끝내는 신자와 비신자의 관면혼 허용을 관철시켰다. 선교 지역인 한국 교회와 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신자와 비신자의 혼인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것이다.


그 해 12월에는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 발생하였다. 심도직물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합법적으로 결성한 노동조합을 탄압한 사건이었다. 당시 가톨릭 노동 청년회 총재를 겸하고 있던 스테파노 주교는 사태의 전말을 파악한 뒤 임시 주교회의를 개최하도록 주교단에 건의하였다. 그 결과 1968년 2월 9일에는 임시 주교회의에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성명서〉가 발표되었으니, 이는 인권과 사회 정의를 위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발언이었다. [9]


◇ 서울대교구장 임명과 추기경 서임


심도직물 사태가 해결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 1968년 4월 어느 날,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Ippolito Rotoli) 대주교로부터 전갈을 받은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는 급히 상경하였다. “축하드립니다. 교황 성하께서 스테파노 주교님을 대주교로 승품하는 동시에 제11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이었다. 마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물었다. ‘주님, 감당키 어려운 십자가를 들려 낯선 타향으로 저를 보내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교황 바오로 6세의 칙서는 1968년 4월 9일 자였고, 발표는 4월 27일 오후에 로마와 한국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스테파노 대주교는 우선 사목 표어를 정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주교 서품 때의 표어를 원문의 한글 표현만 조금 바꾸고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은 5월 29일 명동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스테파노 대주교는 취임 미사 강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천주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 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0]

스테파노 대주교는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한 지 4개월 후인 1968년 10월 6일 로마에서 거행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에 참석하여 교황 바오로 6세 성하와 함께 시복 미사를 집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성탄을 앞두고 발표한 메시지에 이러한 구절을 넣었다.


“나는 괴로워하는 이들, 실의에 빠져 있는 모든 이들과 성탄 밤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 회의를 나누고 싶습니다.” [11]

대주교로 승품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김수환 스테파노 대주교는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추기경이요, 전 세계 130여 명의 추기경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추기경이었다. 이때 그는 ‘무엇보다도 한국 천주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뻤노라.’고 훗날 술회하였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새로 서임되는 추기경은 모두 33명으로, 독일 유학 시절의 은사였던 요제프 회프너 추기경도 함께였다. 이어 5월 1일에는 교황 성하와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추기경 서임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의 명의는 ‘San Felice da Cantalice a Centocelle’였다. [12]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구현하다.


스테파노 추기경이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 7년 동안 스승 요제프 회프너 신부에게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배우면서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독일로 파견되어 온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과 교류하면서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을 실천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천주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독일 사제들과의 교류와 공의회에 관한 담론은 훗날 세상 속에 살아가는 교회를 꿈꾸고 실천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공의회를 개최한 교황 요한 23세(재위 : 1958~1963년)의 가르침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일하면서 공의회 소식을 보도하는 일만큼은 사명감을 갖고 임하였다. 그는 공의회의 정신을 올바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국 교회가 어떻게 변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유명한 스님과 목사, 그리고 사회 명사들에게 ‘천주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루빨리 고쳐야 할 단점은 무엇인지?’ 등을 질문하고, 그들이 보내준 비판적인 답장을 그대로 신문에 게재하였다. [13]


마산교구장 취임 때에는 “우리 교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한 쇄신과 사목 정신을 최선을 다해 신부들과 수도자, 신자들의 협동 하에 구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특별히 공의회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때 ‘세상 속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고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 아래 “언제나 세상에 열려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4]


1967년의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제1차 정기회의에서 신자와 비신자의 관면혼 허용을 관철시킨 일이나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적극 개입하여 수습한 일도 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모두가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사회 정의 구현에 노력한 단면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스테파노 추기경의 기본 정신은 다음과 같은 의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교회는 이 사회의 온갖 악과의 싸움에서 스스로 이긴 자가 되고, 인간성 회복과 사회 정의 구현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15]

◇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한국 사회는 군사 독재 정권의 장기 집권 야욕에 빠져들고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에는 국회 해산 및 정당⋅정치 활동 정지 등에 관한 특별 선언과 함께 비상조치가 선포되었다. 이른바 ‘10월 유신’이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고자 한 사람이 스테파노 추기경이었다.


1974년 7월 6일에는 불법 단체에 자금을 댔다는 이유로 해외에서 귀국하는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젊은 사제들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같은 해 10월 9일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서 열린 전국 성년 대회는 헌정 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정권 규탄 시위로 변하였다. 당시 회의차 로마에 머물고 있던 스테파노 추기경은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에게 한국 사회의 실상과 교회의 입장을 잘 설명하여 이해시켜 주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와 개신교 합동 기도회에서는 유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 구국 선언문’이 발표되고 관련 인사들이 구속되었다. 이어 1978년에는 ‘전주 7⋅6 사태’가 발생하였다. 전주에서 경찰이 성당에 난입한 뒤 신부들을 구타하고 그중 한 명을 길에 유기한 사건이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는 전주로 내려가 사태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한편 이 무렵부터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보수 성향의 사제들은 별도로 ‘구국 사제단’을 구성하여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16]


1979년 10월 26일 장기 집권하던 대통령이 부하의 손에 살해된 뒤 군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12⋅12 군사 반란이었다. 그 이듬해 5월 18일부터는 광주 시민들이 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며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민주화 운동은 1987년 1월 14일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숨진 것을 은폐하려고 한 사건이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1월 26일에 봉헌된 미사 강론에서 정권의 야만성을 소리 높여 비난하였다.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지금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물은 것처럼 ‘네 아들, 네 제자, 네 국민인 박종철 군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17]

1987년 6월에는 군사 반란의 또 다른 주역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그러던 중 6월 10일에는 규탄 대회를 마친 학생과 시민 수백 명이 경찰에 밀려 명동대성당 경내로 들어갔고, 경찰이 이들을 강제 연행하겠다는 방침을 굳히자 스테파노 추기경이 여기에 맞섰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18]

추기경의 단호한 어조에 경찰은 학생들의 귀가를 보장하며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처럼 스테파노 추기경은 군사 정권의 강압 통치와 인권 유린에 맞서 미사 강론과 담화문 등을 통해 항거하였다. 군사 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힌 이들이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폭행을 당하거나 투옥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굴하지 않은 스테파노 추기경의 목숨을 건 행보는 군사 정권의 전횡을 막고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하나의 기반이 되었다.


사실 스테파노 추기경은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대사회적 메시지를 정치적 동기나 이념 노선에서 발표한 적도 없었다. 그 자신의 고백처럼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것만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19]


◇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의 벗


1967년의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에서 본 것처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일찍부터 노동자들의 인권과 사회 정의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1978년에는 인천 동일방직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이들을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루카 10,25-37)이라고 여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다. 8월 20일에는 명동대성당에서 기도회를 열고 노동자들의 인권 탄압을 중지하라는 성명도 발표하였다.


1979년 여름에는 경북 영양에서 ‘오원춘 사건’이 발생하였다. 가톨릭 농민회 회원인 오원춘(吳元春) 알폰소가 피해 보상을 받아내자 농민들의 피해 보상 운동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경찰이 그를 납치해 폭행한 사건이었다. 이에 안동교구에서는 항의 집회를 열었고, 경찰에서는 신부들을 구속하고 가톨릭 농민회를 탄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스테파노 추기경은 즉시 안동 성당으로 내려가 정부의 농민 운동 탄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20]


1970년대에는 서울 양평동 철거민들에게, 1986년에는 상계동 철거민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고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과 아픔을 나누었다. 쓰레기 매립장인 난지도와 성매매 여성들의 쉼터인 막달레나의 집, 베트남 난민 보호소 등지를 방문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고, 장애인과 광부들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용기가 없어서 그들과 함께 살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였다. [21]


스테파노 추기경은 남북 분단을 가슴 아파하며, 억압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늘 기도하였다. 1975년 6월 10일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된 뒤에 맞이한 한국전쟁 기념일에는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는 첫 메시지를 발표하였고, 1977년 평양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미사 강론을 통해 북한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표하였다. [22]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때는 북한 신자들을 초청하려고 노력했으며, 1992년부터 여러 차례 방북 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23] 1995년에는 북한의 복음화와 동포 지원 사업을 위해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소외된 약자들의 벗이자 대변인이 되고자 하였다.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현실 참여를 실천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는 1970~1980년대의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스테파노 추기경이 늘 자신에게 되묻곤 하던 질문이자 기도였다.


◇ 착한 목자요 깨어 있는 지성, 겸손한 바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98년 4월 3일 서울대교구장에서 퇴임하였다. 추기경으로 서임된 지 30년, 사제가 된 지 47년 만이었다.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독재와 억압으로 얼룩진 정치 상황을 거치면서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1코린 4,11) 있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해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중심에는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다. 그는 군사 정권의 억압에 항거하면서 사회 정의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2007년에 그린 자화상 옆에 ‘바보야’라고 적었다. 하느님이 사랑과 진실임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살아서 그렇다는 겸손한 표현이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2010년에 이 바보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을 계승하기 위해 ‘바보의 나눔’ 재단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 가톨릭대학교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연구소’를 설립하였고, 2017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그의 고향인 경북 군위에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을 세워 추기경의 삶을 기리고 있다.


스테파노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87세로 선종하여 2월 20일 장례미사 후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사후에 안구를 기증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두 사람에게 빛을 주었다. 5일 동안의 장례 기간 동안 추기경의 유해가 안치된 명동대성당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추모 행렬이 길게 이어졌으며, 조문객은 교회 안팎을 합쳐 40만 명을 상회하였다. 이처럼 그는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전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은 종교 지도자였으며, 시대의 어른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자신의 사목 표어처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살았던 착한 목자이자 깨어있는 지성이었다. <마침>


  • [1]김수환 추기경 구술, 김원철 정리,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평화방송⋅평화신문, 2009, 50~56면.
  • [2]위의 책, 57~64면.
  • [3]게페르트(1904~2002) : 독일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1954년에 내한하였으며, 1960년 4월 18일에 개교한 서강대학교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 [4]《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80~97면, 109~123면, 125~135면.
  • [5]위의 책, 138~143면, 148~158면.
  • [6]위의 책, 163~172면.
  • [7]위의 책, 173~176면.
  • [8]김수환 추기경 전집 편찬위원회, 《김수환 추기경 전집 17 ‘말씀의 이삭’》, 가톨릭출판사, 2001, 250~251면.
  • [9]《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186~203면.
  • [10]위의 책, 211면.
  • [11]위의 책, 218면.
  • [12]위의 책, 206~211면, 223~227면, 230~235면.
  • [13]위의 책, 168~177면.
  • [14]위의 책, 190~195면, 211면.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스테파노 추기경의 인식은 〈교회가 사회 문제에 침묵할 수 없는 이유〉, 〈사회 속에서 종교의 역할〉, 〈교회의 현실 참여〉, 〈생명 우리의 평화〉 등에 대한 설명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김수환 추기경 전집 15 ‘이 시대를 사는 목자 1’》, 92~95면, 307~312면, 468~473면, 650~651면).
  • [15]《김수환 추기경 전집 12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 403면.
  • [16]《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증보판)》, 256~270면, 281~289면.
  • [17]위의 책, 368면.
  • [18]위의 책, 370면.
  • [19]〈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7, 《평화신문》 제760호, 2004년 2월 15일 ; 위의 책, 271면.
  • [20]위의 책, 291~300면.
  • [21]〈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1, 《평화신문》 제774호, 2004년 5월 23일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평화신문》 제921호, 2007년 5월 20일.
  • [22]《김수환 추기경 전집 12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 333~335면 ; 《가톨릭시보》 1084호, 1977년 12월 11일.
  • [23]《김수환 추기경 전집 15 ‘이 시대를 사는 목자 1’》, 600~601면, 612면 ; 《김수환 추기경 전집 16 ‘이 시대를 사는 목자 2’》, 81~9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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